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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예술가 만나기

폴 고갱 - 증권맨에서 화가로!

미토1004 2024. 11. 25. 23:49

오늘 프리다 칼로 외에 유명한 여성 화가가 있는지 많은 자료를 찾아보았는데 거론되는 이름들이 모두 생소했다.

찾기를 포기하고 며칠 전에 기록했던 고흐의 삶과 예술에 영향을 미친 폴 고갱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고흐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고갱이다.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르게 된 것도 고갱과 예술에 대한 관점이 달라 계속 싸우면서 심리적인 불안정이 더욱 커진 결과라고 한다. 그래서 고흐의 귀를 자르게 한 나쁜 인간-고갱-으로만 알았지 고갱의 작품세계나 그의 예술성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은 거 같다. 

 

고갱도 고흐처럼 처음부터 예술가의 길을 걸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의외의 이력이 있었다.

이분 알고 보니 처음에는 증권맨이었다. 증권맨으로 일하다가 증권회사에 취직을 시켜준 귀스타브 아로사의 영향으로 미술 작품 수집에서 취미로 미술을 배우다가 직업이 된 예술가였다.

 

오늘의 이야기는 증권맨에서 위대한 예술가가 된 폴 고갱이다.

폴 고갱, <이젤을 앞에 둔 자화상>,1885, 출처 https://namu.wiki/w/%ED%8F%B4%20%EA%B3%A0%EA%B0%B1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의 본명은 '외젠 앙리 폴 고갱'으로 후기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프랑스 화가이다. 전통적 예술 규범을 넘어 독창적이고 강렬한 색채와 형태를 탐구한 예술가로,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구축하며 20세기 현대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주요 작품으로 <황색의 그리스도>, <브르타뉴의 시골 여인들>, <마리아를 경배하며>, <타히트의 여인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가 있다.

 

고갱은 프랑스에서 출생했으나 1848년 2월 프랑스가 공화국으로 선포되면서 진보주의 정치부 기자였던 아버지가 아내의 고향인 페루로 가기로 결정하면서 다섯 살까지 페루에서 어머니와 살았다.(아버지는 페루로 가던 도중 심장병으로 사망)

그러나 1854년 친할아버지의 사망으로 유산을 받기 위해 프랑스로 돌아왔지만, 마음의 고향인 페루를 잊을 수  없어 5년간 선원생활을 하며 세계 곳곳을 누볐다고 한다.

 

1871년 어머니가 사망하면서 프랑스로 돌아왔고 깊은 충격을 받은 건지 다시는 바다로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어머니의 친구이자 후견인이 된 '귀스타브 아로사'의 소개로 증권중개소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의외로 페루에서의 생활덕에 외국어에도 능통하고 노련함이 있어서 증권맨으로 승승장구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로사'는 아마추어 화가이자 사진가로 여러 작품을 수집하고 있었는데 이 영향으로 처음에는 고갱도 작품을 수집하고 미술을 재테크 수단 정도로만 보았다고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미술에 대한 매력에 이끌려 그림을 그리게 되었고 퇴근 후에는 미술학원에 다니면서 그림 그리기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로사는 고갱의 그림인생에 큰 영향을 미칠 인상주의 거장 피사로를 소개해 줬다고 한다.

 

피사로는 고갱의 열정을 눈여겨보고 모네와 르누아르가 고갱은 아마추어라고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1879년 인상주의 전 작품전에 전시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고 합니다. 증권맨이지만 이미 화가의 정신을 가진 21세 고갱은 <파리 카르셀 거리, 화의 가정>과 같은 그림을 그리게 되는 경지에 오르게 됐다고 한다.

폴 고갱, <파리 카르셀 거리, 화가의 가정>, 1881, 출처 방구석 미술관 중

 

모든 직장인들이 그러하듯 고갱도 증권맨과 화가의 길에서 갈등하고 있던 때 , 1882년 프랑스에 급격한 경기 불황이 닥치고 증권회사에 해고를 당하게 됐다. 보통 사람들처럼 고갱도 화가로서 승승장구할 수 있을 거라고 환상에 빠졌을지 모른다.

 

현실은 신인 작가에 불과한 고갱의 그림을 사는 사람도 없었고 다섯 아이를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이었다는 거다. 지질하고도 처절한 고갱의 삶이 시작되었고, 생활비도 떨어져 아내가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가버리자 혼자 지내기 버거워 뒤따라갔다고 한다. 그리고 방수원단 공장, 단돈 5프랑을 벌기 위해 벽보를 붙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고갱은 그림 그리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찾은 콘셉트가 '원시와 야생'이라고 한다. 문명에서 벗어나 '원시와 야생'이 살아있을 공간을 찾았는데 그곳이 타히티였다고 한다.

 

타히티에 있는 원주민들과 생활하며 그림을 그리고 원주민 소녀와 혼인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타히티에서 10여 년 동안 그림을 그려 파리에 보냈지만 오랜 기간 동안 인정받지 못했고, 죽기 3년 전부터 조금씩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타히티에서 지독한 매독에 시달리며 자살시도까지 했으며 1903년 생을 마감했다.

 

그럼 고갱을 외면했던 가족들, 그리고 살아있을 동안 인정받지 못했던 고갱이 추구하던 작품세계는 무엇일까?!

  • 상징주의
    고갱은 자연을 단순히 모방하지 않고, 색채와 형태를 상징적으로 사용해 감정을 표현했다고 한다.
    아래 그림은 <예배 뒤의 환상>이라는 작품으로 제목 그대로 어떤 여인이 예배 후에 영적인 환상을 보고 있는 장면을 담은 거라고 한다. 머리에 쓴 하얀 두건은 브르타뉴 지방을 여인을 상징하고, 두 사람이 싸우는 그림은 야곱과 천사가 싸우는 성경의 한 구절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폴 고갱, <예배 뒤의 환상>, 1888년 , 출처 위키백과

 

  • 원시주의
    고갱은 문명화된 서구 사회를 떠나 자연적이고 단순한 삶을 추구했으며, 특히 타히티와 폴리네시아의 원주민 문화를 이상화하여, 그들의 삶과 신화를 작품에 담았다고 한다.

폴 고갱, <마리아를 경배하며>, 1891, 출처 방구석 미술관 중

 

폴 고갱,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892, 출처 위키백과

 

고갱의 작품은 위 그림들 예시처럼 꺼운 윤곽선, 평평한 색면(추상 표현주의의 한 흐름), 강렬한 색채 사용하는 것으로 유하다고 한다. 또한, 전통적인 원근법을 무시하고 색채와 구도를 통해 작품의 감정을 극대화했으며, 당시에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이후 표현주의, 야수주의, 원수주의, 추상주의 회화로 이행되는 씨앗이 되었다고 한다.

 

고갱에 대해 알아보면서 그의 집념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갱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제대로 된 시각으로 바라보지 못한 나 자신이 부끄러울 정도였다. 자신만의 그림을 찾기 위해 문명을 버리고 원주민의 삶까지 택한 고갱.

 

나도 지금 그림을 배우고 있는데 고갱 같은 길은 도저히 할 수 없을 거 같다. 위대한 예술가는 그냥 탄생하지 않는 거 같다.

고갱의 정신을 배우며 오늘의 글을 마친다.

 

* 참고문헌 : 이연식의 서양 미술사 산책(이연식 지음),  방구석 미술관(조원재 지음)